최근 M방송사에서 방영했던 학생래퍼를 다룬 프로그램이 다시보기로 재방영되길래 시청한 적이 있다. 정말 고등학생일까 싶을정도로 철이 너무 일찍 든 것 같아 보이는 신청자가 보이는 반면에 아직은 애나 다름 없구나 싶은 사람들도 여럿 모여 있는 이 프로그램은 오히려 나로써 어른스러움은 나이에 비례하지 않는 다는 생각을 들게끔 했다. 그 무수히 많은 도전자 중에서도 홀로 흑으로 뒤집어 쓴듯 한 참가자가 있었는데, 그가 공연 중 뱉은 한 랩 가사였던 “네가 뒷담화를 까댄 애도 너를 뒤에서 말해 어디를 봐도 모순들만 넘쳐나지 그래”가 프로그램이 끝나도 한동안 내 기억속을 배회했다. 너무도 날카로운 지적이였다. 사회는 모순들로 가득하다. 그걸 대번에 꼬집어 낸 가사는 다시 생각해도 속이 시원했다.
왜 사람들은 모순적인 삶을 살아가는 걸까. 왜 한 입으로 두말하지 않기라는 말이 생길 정도로 사람들은 앞 뒤가 다르게 살아가는 걸까. 아주 뜬금없게도 나는 철학자나 던질법한 질문을 내 자신에게 되내었다. 내가 말하는 그 사람이 다른 사람이게도 똑같이 그 사람이 아닌 경우가 많다. 나에게 너무나도 친절한 사람이 다른 누구에게는 원수일수도 있고, 그 사람의 친절은 나에게만 국한되어 있을 수 있다. 결국 내가 내린 결론은 그거였다. 사람들은 이미 충분히 영악해서, 자신의 이득을 취할 수 있게 판단을 내릴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다. 그러니까 다시 말해 사람들은 자신의 이득을 위해서라면 어떤 짓이든 할 수 있는 이야기가 된다.
맞다, 이건 어쩌면 일반화의 오류일 수도 있지만, 나는 계속 강조했듯이 ‘대개’ 사람들이 이렇게 살아오고 있다는 것에 대해 이야기 하고 싶었다. 나 역시도, 그래왔다. 사람이 거짓말을 했을때 가장 빨리 그게 거짓임을 증명할 수 있는 건 바로 상황에서, 혹은 그 사람의 말이나 행동에서 모순을 발견했을때다. 가령 A라는 사람이 B에게 가서는 자신이 시험에서 올백을 맞았다고 말하지만, C에게는 전체에서 다섯개 정도 틀렸다고 말했다면, 그가 한 말이 거짓말임을 바로 알 수 있다. 왜냐, 그의 말이 달랐기 때문이다. 그가 이렇게 말한 이유는 많을것이다. B라는 아이가 평소 A의 라이벌이라면, 자신이 더 우위에 있다거나 자신의 위치, 혹은 명예등을 지키기 위해서 이렇게 말했을 가능성이 높다. 아니면 C가 자신의 소중한 사람이거나 혹은 자신의 가까운 친구라서, 그리고 그 친구가 자신은 이번에 시험에서 틀린게 있다며 우울해하기때문에 위로 혹은 공감해주기 위해서 그런 말을 뱉었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게 설령 거짓말이건, 하얀 거짓말이건, 그가 모순적이게 군 것임은 바뀌지 않는 사실이다.
요즘 사회에서 소위 ‘맞는 말’, 즉 정의롭게 행동한다면 그것은 ‘착한 척’ 혹은 ‘가식’에 지나지 않다는 말을 듣는다. 가끔 어떤 사람의 용기는 ‘융통성과 공감능력이 떨어지는’ 행동으로 판단되며, ‘재수없다’ 라는 프레임을 씌우기도 한다. 진실은 그릇되고, 불편해지고, 왜곡되어 가며 그에 잇따른 비극은 사회가 낳은 피해자들에서 비롯된다. 앞뒤가 같기는 힘든 일이다. 사람들은 언제든 원치 않는 상황이 눈 앞에 닥칠 때가 있고, 많은 사람들은 그 상황만을 모면하기 위해 일시적인 방어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방어는 일시적인 만큼 허술하고 사소하며, 그 후에 오는 대가는 보다 더 크고 공격적으로 다가오기 마련이다. 사소한 거짓말은 오해를 낳고, 그 오해는 결국 과거의 자신을 갉아먹게 되기 때문에. 그럼 그때가서야 사람들은 물을 것이다. “왜 그때 거짓말했어? 솔직하게 말했으면 됐잖아.” 그리고 그 후에 느껴질 자신에 대한 신뢰도 하락과 온갖 무성한 뒷얘기들은 과거의 자신을 탓하게 만들것이다. “왜 그랬지?” 라면서.
그렇지만 과연 그때 솔직하게 말한다고 해서 해결될 일이였을까? 아니다. 당신을 거짓되게 만든 것이 분명 존재했을것이다. 그게 상황이던, 사람이건, 행동이건 간에 당신은 그때로 돌아가더라도 거짓말을 하게 될 것이다. 그러니까 정리해보자면, 사람은 모순적으로 행동하게 되어있다는 게 요점이다. 너무 다른 사람들이 한 세계를 살아가고, 그 세계 안에는 너무 다르고 복잡한 관계들이 얽히고 설켜있을 것있기 때문에. 누군가는 누군가보다 우위에 있어서, 혹은 잘보이고 싶어서. 다른 누구는 자신을 과시하고 싶거나 세상에 알리고 싶어서. 결국 사람들은 자신의 이득을 어떤 방식으로든, 그게 설령 사실이거나 거짓일 지라도, 취할것이고, 제일 쉬운 방법은 자신만의 모순으로 만들어진 가면, 즉, 페르소나(persona)를 쓰는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모순적인 사람들이 모여서 살아가는데, 어떻게 사회가 모순적이지 않을 수 있을까?
나 또한 그랬다. 거짓말로 상황을 모면했고, 모순적으로 굴어 이득을 취하는 삶을 살아온 것은 나에게 있어서 생존수단이였기에. 그러나 몇차례 상황이 반복되고, 내가 뱉은 말들이 더 이상 내가 감당할 수 있는 크기의 것들이 아니게 되었을때가 되서야 나는 비로소 모순은 그 찰나의 출입구를 만들어 주지만, 그게 내가 온전히 나를 압박하는 것들로 부터 피할 수 있게 해주는 출구가 아님을 실감했다. 내가 더 많은 거짓을 뱉어낼 수록, 더 많은 도피처를 찾아갈 수록 되려 나에게서 탈출구는 멀어졌고, 오히려 원치 않던 것들이 한꺼번에 물밀듯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을 때에서야 나는 나와 모순과의 관계에 대해 돌아볼 수 있게되었다.
아직 가슴에 손을 얻고, 한치의 거짓없이 살고 있냐고 묻는다면 나는 아마 대답할 수 없을것이다. 아주 자연스럽게 스며든 이 지긋지긋한 습관은 저도 모르게 툭 튀어나오기 십상이였다. 그 한마디, 한 행동으로 내가 져야하는 책임감이 막심하다는 것 정도는 알아차렸지만, 모순적으로 행동하는것 만큼 그 상황을 모면하기 제일 쉽고 간단한 방법도 없었다. 그렇다. 이건 아마 내 평생의 숙제가 될 게 분명했다. 왜냐하면, 아주 부끄럽게도, 나 역시, 아직 모순과 동거중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