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하게 여유롭다고만 생각했던 여느 날의 수요일 이른 밤에, 한동안 연락이 되지 않던 친구와 연락이 닿았다. 일전에 경험을 쌓기 위해 다녀왔었던 캠프에서 만난 친구였는데, 타지에서 동지를 만난 탓이였을까, 우리는 곧바로 둘도 없는 친구가 되었고, 캠프 그 후 각자 떨어진 와중에도 계속해서 연락을 주고받게 되었다. 이상하게도 잠잠했던 친구가 갑자기 연락을 한 이유가 궁금했지만, 전화를 해도 되냐는 친구의 물음에 나는 그저 응, 이라고 한 마디로 대답했다. 다짜고짜 전화를 해도 되냐는 말은 생각보다 그 질문 아래에 담아놓은 것들이 많다는 거나 다름이 없어서. 아무에게나 털어놓고 싶지만 그전에 넌지시 일러줄때나 사용하던 물음이였다. 짧지만 묵직하게. 그에 대한 내 대답은 ‘깊게 묻지 않아도 나는 너를 이해할 수 있다’ 라는 둘만의 암묵적 신호였다.
전화를 받자마자 나는 내 예상이 적중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 애의 목소리에 물기가 서려져 있었고, 울음을 참는 듯한 목소리가 이미 상황을 대변해주고 있었다. 아무리 숨긴다고 해도 말할때 본인도 모르게 제 목소리가 떨려오는 것까지 조절할 수는 없는 노릇이였다. 그 애의 첫마디는 “나 어떡해. 학교생활 망한것 같아.”였다. 이야기를 간략하게 설명하자면, 그 내용은 대략 이렇다. (편한 설명을 위해 친구를 A 라고 부르고, A가 짝사랑하던 남학생을 B로, 그리고 동아리 남선배를 C라고 부르겠다.) 사건의 발단은 A가 새학기에 들을 동아리를 찾던 중에 일어났다고 한다. 그때 당시에 A는 이미 짝사랑 하는 남자애 B가 같은 반에 있었고, 그 애와 친해질 구실을 찾다가 B가 들어간 동아리를 알게 됬고, 그를 따라서 입부했다. 그러나 A의 본래 계획과는 다르게 C라는 선배와 같은 전담부에 맡겨졌고, 같이 일을 하다보니 본의 아니게 C와 더 친해지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던 중 우연히 C한테 A가 B를 좋아한다는 걸 들키게 되었고, 그에 C는 눈치껏 A를 도와줘 A와 B가 가까워질 수 있도록 조력자 역할을 톡톡히 했다고 한다. 문제는 B나 C가 아니였다. 바로 그 동아리에 있던 다른 부원들, 즉 A와 친하지 않던 제 3자들이였다. 학교가 작아서 였는지, 아니면 그들이 영향력이 컸던 사람들이였는지, A는 어느날 부터 갑자기 모르는 선배들에게 눈초리를 받으며, 심지어는 대놓고 적의를 보이는 이들때문에 매일매일이 가시밭길을 걷는 기분으로 학교를 다녔다고 했다. 무엇보다 그 이유를 A에게 알려주지 않아서 A는 한동안 이유를 알지 못한 채 억울한 채로 학교로 갔다고 한다. 나중에는 괴롭힘이 더 강해져서 아프다고 거짓말을 하고 학교를 일주일동안 가지 않았다고 말해왔다. 전학을 가야할 것 같다고 마음먹고 나서야 A는 사건의 전말을 들을 수 있었다. A가 C의 도움으로 B와 친해지던 당시에, 같은 동아리 부원들이 A가 B와 C 사이에서 소위 어장을 치고 있다고 소문을 내며, 그와 더불어 A가 헤픈 아이라며 저들끼리 뒤에서 험담을 하고 다녔던 것이였다. A는 전화로 울면서 내게 상황을 전했고, 나는 분통이 터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비겁하기 짝이 없었다. 무엇보다 화가 나는 건 헤프다고 한 이유가 바로 A가 B와 C에게 매일같이 눈웃음을 쳤기 때문이라는 것이였다. 한참을 A를 다독여주고, 같이 그 제 3자들을 씹어주고 나서야 A는 고맙다며 전화를 끊었다. 그러나 나는 끓어오르는 화를 쉽게 다스릴 수가 없었다. 나에게는 너무나도 소중한 사람이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에게 억울하게 화를 당했다고 생각하니 괘씸해서 진정을 할 수가 없었다. ‘헤프다' 라는 말을 그렇게 쉽게 사람에게 쓸 수 있던 말이였나? 언제부터 그 단어가 사람을 욕보일 때 쓰이던 말이 됬던가?
사전적 정의로 ‘헤프다' 라는 말은, (네이버 사전에 따르면) 본디 쓰는 물건이 쉽게 닳거나 빨리 없어지는 듯하거나 물건이나 돈 따위를 아끼지 아니하고 함부로 쓰는 버릇을 뜻한다. 그러나 언젠가부터 이 ‘헤프다’라는 말의 뜻은 퇴색되었다. 더이상 물건이 아니라 사람에 쓰임으로써, “이성(혹은 동성)과의 색色을 밝히는 사람” 으로 그 뜻이 완전히 바뀌어버린 것이다. 사람의 가치를 깎아내리고, 성적으로 되바라진 의미를 부여하는 이 표현을 함부로 사용해 상처를 주는 건 더없이 비겁한 행위였다. 이 말이 가장 무서운 이유는, 뜻이 아니라 그 ‘기준’ 때문임이 더 컸다. 헤픈것과 가벼운 것의 기준은 정말 종이 한 장 차이지만, 그 기준이 너무나도 주관적이라 위험이 더 컸다. 무엇보다 그 단어를 사람에게 씌임으로써 그 사람이 갖게 되는 인상 또한 크게 좌지우지 될 수 있었다. 말은 그 어떤 것보다 강한 힘을 지니고 있었고, 그만큼 내뱉은 말은 되돌리기 어려웠다. 고작 사람에게 웃은 걸 가지고도 헤프다고 한다면, 그보다 더 한 사람은 뭐라고 불러야 하는가. 그만큼이나 그 제 3자들이 제 기분을 풀려고 말하는 단어들은, 그 무지함만큼이나 크게 부풀려져 고스란히 A에게 비수를 꽂혀 크나큰 상처를 남겼다.
A는 웃을때 양 쪽으로 깊게 보조개가 파인다. 무쌍에 고양이같이 올라간 눈매는 고스란히 겹쳐지고, 양 볼은 웃음과 동시에 올라가서 어린애처럼 보이게 할때도 있다. 같은 여자가 보기에도 더없이 사랑스러운 웃음이였고, 또 다른 누군가에게도 필시 사랑스러워 보일 그 눈웃음을 ‘헤프다' 라는 말 한마디로 ‘목적이 불순한 행위' 가 되는 것이 나는 분했다. 관계는 어렵다. 때론 눈치를 챈다고 해서 상황이 나아지지 않는다. 사람은 본래 자기주관적이며, 남을 보는 시선 또한 이기적이고, 성급할 때가 많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남을 평가하고, 그 사람의 가치를 마음대로 재단하는 것은 정당하지 못하다. 그러니 말을 할때 원래 하려던 말의 가치를 곱씹고, 그 목적을 되돌아보지 않으면 그것은 곧 무지함을 빙자한 공격으로 되돌아온다. 함부로 판단하려 들지 말자. 상처주지 말자. 그 한마디가 열 마디가 되어 돌아온 다는 것을 잊지 말고, 그 말을 받은 사람은 그 덫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걸 스스로에게 인식해야 한다. 상처주는 것을 목적으로 말한다 한들, 그로인해 얻는 상쾌함은 그 말을 하는 단 1초뿐이다. 본인은 망각하고, 상대방은 괴로워한다. 나 역시도 그래왔고, 그런 나 역시도 줄곧 당해왔던 일이다.
친구야, 나는 너가 이 글을 볼지 안볼지는 장담할 수 없지만, 만일 너와 같은 처지에 사람이 혹시라도 이 글을 읽게 된다면, 나는 말해주고 싶다. 너는 그 누구보다 사랑스러운 웃음을 지녔고, 그 어떤 말에도 흔들리지 않을 수 있는 마음을 가져야한다. 너가 백번천번 아니라고 말해도 그들은 맞다고 할거고, 너가 아니라고 말하는 만큼 그들은 너를 조롱하는 것에 즐거움을 느낄거니까. 그러니까 너는 일일이 그들에게 맞추려 들지 말고, 오히려 그들의 예상을 빗나가게, 그들이 자신의 무지함을 느낄 수 있게끔 더 강하고, 더 완벽해져라. 어짜피 우리가 어떻게 하던 간에, 우리는 언제나 삽시간에 평가되고, 매장에 놓인 신발 만큼이나 비교되고, 재단될 거니까. 너에게 못되게 구는 사람이 있으면, 언제나 그 반대에 서있는 사람이 있는 법이니까. 나만큼이나 너를 사랑해주는 사람도 분명 존재하기에. 너의 수고는 너만 알면 돼. 우리는 항상 가볍되, 헤프지 않게 살아가자. 딱 우리 마음이 가볍고 편한 만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