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이맘때쯔음에 혜성처럼 떠오른 신조어가 있다. 바로 ‘사이다' 와 ‘고구마' 라는 신조어다. 본디 한국에서는 예로부터 음식을 상황 혹은 사람에게 붙여 사용해왔지만 ~남 혹은 ~녀 같은 수식어가 아닌 원단어 자체로 쓰이는 것은 저 두 신조어가 처음이였다. 그러나 곧바로 이 두 신조어들은 궁금증을 자아낸다. 왜 하필 콜라도 아닌 사이다이며, 왜 감자가 아니라 고구마일까? 이 단어들은 도대체 어떤 곳에서 파생되어 온걸까? 어째서 사람들은 ‘사이다’에 집착하며 ‘고구마'같은 상황을 기피하려 하거나 욕하는 걸까?
‘사이다'를 생각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것은 탄산의 청량함이다. 톡 쏘는 탄산이 시원하게 목막힘을 넘겨주는 장면을 연상케 하는 ‘사이다'는 흥미롭게도 ‘소화제' 역할 또한 대신 한다고 한다. 놀라운 사실 한가지가 있다면, 사이다는 콜라가 우리 나라에 시판되기 전부터 이미 일본을 거쳐 수입되어왔다. 그렇기 때문에 정감가는 그 시절을 재현한 드라마 <응답하라 1998>에서 삶은 계란 노른자의 텁텁함을 사이다로 무마하는 장면이 나왔던 것이다. 쉽게 발음할 수 있는 이름과 청량한 이미지로 각인된 사이다는 그 은어 그대로 답답한 상황을 시원하게 해결 해 줄 때 사용되는 신조어다. 예시를 들자면 ‘사이다' 라는 말은 거의 부조리한 상황에서 올바른 말을 하거나 상대방을 논리로 제압했을때, 혹은 정의를 구현했을때 사용된다.
이렇듯, 속이 뻥 뚫리는 듯한 상황이나 주인공의 행동을 ‘사이다'라고 부르듯이, 그의 반댓말인 ‘고구마'도 같이 생겨났다. ‘사이다'와 같이, ‘고구마' 또한 어원 그대로를 뜻으로 사용해 고구마를 먹은듯이 답답한 상황이거나 누군가가 답답한 행동을 할때 사용된다. 이 두 가지 신조어는 어떻게 보면 그냥 음식 이름을 따온 아무것도 아닌 말장난과 다름 없을 수도 있지만, 어떻게 이렇게 삽시간에 퍼져나가 유행어가 될 수 있었던 것일까? 그 해답은 현재 우리의 사회에 있다.
‘헬조선,’ 즉 지옥같은 우리나라 라는 뜻으로 사용될 정도로 현 우리나라의 사회는 바쁘고 치열하며 이기적이고 부당하다. 취업난이 일어나고, 알바 최저임금 문제가 현 시대까지도 해결되지 않았으며, 갑질 논란은 여전히 생겨나고, 현대 캐스트 제도라고 말하는 수저계급론이 논란이 된다. 근본적인 문제는 권력을 쥠으로써 사람들이 변하가며, 그 권력을 위해 부조리한 일을 일삼고, 다른 사람을 깔보고, 이런 순리가 반복되면서 혼란은 또 혼란을 낳고 결국 ‘헬조선'이라는 말까지 나오게 만들었다. 살기 힘든 나라. 죽어라 노력해도 한계가 너무 명확한 사회. 청년들은 고통받고, 갑론을박은 당연해지며, 사회는 무책임하다. 그래서 사람들은 더 이상 바보같이 당하기만 하는 주인공을 바라지 않고, 인내를 기르면서 성장해나가는 주인공을 원치 않는다. 그들은 대리만족을 하며, 자신이 바라보는 답답한 현실에서 자신이 못해도 ‘누군가는 해줬으면' 하는 판타지 속 욕구를 채워 줄 누군가를 갈망한다. 고구마 백개를 먹은 것 마냥 답답하고 부조리한 현실에서 다수는 아주 극히 있을 소수가 그들에게 사이다를 건네주길 바란다.
과거의 사람들은 자기계발에 힘써나갔다. 무언가를 죽어라 노력하면 언젠가는 그것을 달성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진 주인공을 응원하고, 그들의 발돋움에 도움이 될 만한 성장물을 보며 사람들은 그동안의 갈망을 풀었다. 하지만 지금의 사회는 ‘아프니까 청춘이다' 라는 말이 무색할 만큼 이미 넘어야 할 장벽이 수없이 많고, 수천가지 이유와 핑계들로 그들을 가로막는다. 생활고가 부족하고, 태어날 때부터 다른 수저, 즉 가족 재산소유비가 다르면 아무리 높이 올라간다고 해도 그 위에 있는 자들을 넘을 수 없어지고, 혹 넘더라도 기적으로 치부될 만큼이나 그 확률이 현저히 낮다. 사람들은 되도록 자신들이 아프지 않길 바라고, 이 답답한 현실에서, 자신의 생활을 지키기 위해 그 부조리한 것들을 참아야 어른이 된다는 생각을 가지고 살아간다. 정의 대신 권력을 지니고, 발언권을 지키는 대신 인내를 가지고 ‘사회가 주는 아픔'을 견뎌내야 하는 사람들에게 더 이상 ‘고생 끝에 낙이 온다' 라는 말은 그 뜻마저도 퇴색되어 무의미해진다.
더 이상 가만히 있고 싶어 하지 않는 자들. 그러나 현실에 굴복해야 하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이 모이고 모여 아무리 드라마나 만화같은 허구의 내용이더라도 주인공이 부조리한 사회에 맞써 싸우고 옳은 말로 소위 악당들을 이기는 것에 사람들은 더욱 열광한다. 현실에서도 용기있고 당찬 포부를 지닌 이들에게 ‘사이다'라는 칭호를 주고, 그들을 응원하며, 그로인해 힐링을 얻는 셈이다. 사회가 더 발전해 갈수록, 부패된 것들은 더더욱 수면 위로 부풀어 올라오며, 사람들은 ‘정의로움'을 토대로 사회에 맞써 싸워나간다. 더 이상 참기만 해서는 해결 될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오늘의 그들은 목소리를 높히고, 당당히 시련을 견뎌내고, 부조리함에 대응한다. 옳은 말은 하는 건 나쁜게 아니고, 눈치 보일 일이 아니며, 당연하게 여겨져야 한다는 사실을 지금 현 시대의 사람들은 명확하게 알고 있다. 권선징악(勸善懲惡) 이라는 말은 결국 ‘사이다'를 마시게 되는 순간에 온다는 것. 만일 지금 사회가 ‘고구마' 만큼이나 답답하고 불리하고 무지하다면, 어쩌면 이 ‘사이다'를 향한 갈망이 후에 현 사회를 더욱 청렴하고 정직하게 만들어 주는 계기가 되지 않을까. 만화나 드라마에서 나오는 정의구현과 그 이후 이어지는 행복과 꽃길같은건 바라지 않아도, 적어도 할말은 다
하고도 속이 후련해진다면 이미 당신은 ‘사이다' 의 주인공이 되기 충분하다.